“단상자까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배송 박스도 우리가 챙겨야 합니까?”
PPWR을 설명하고 나면 가장 자주 돌아오는 질문이다. 답부터 말하면, 챙겨야 한다. 다만 같은 포장이라도 층이 다르고, 층마다 붙는 의무가 다르다.
지난 회에 EU가 내용물을 보는 법(화장품 규정 1223/2009)과 별개로 담는 것을 보는 법을 세웠다고 언급했었다. 포장·포장재 규정 PPWR, 정식 명칭 Regulation (EU) 2025/40이다. 지난 8월 12일부터 일반 적용을 시작했다.
먼저 정의부터 살펴보자. PPWR 3조는 재질이 무엇이든 △ 제품을 담거나 △ 보호하거나 △ 다루거나 △ 전달하거나 △ 보여 주는 데 쓰는 물품을 포장으로 규정한다. 다섯 기능을 모두 갖출 필요가 없다. ‘하나만 해도’ 포장이다.
그래서 제품의 일부가 되어 끝까지 함께 쓰이고 버려지는 것이 아닌 한, 제품을 둘러싼 물건은 대부분 여기에 걸린다.
립스틱 한 자루로 이해하는 방법
이제 립스틱 한 자루가 EU 소비자에게 가는 길을 따라가며 하나씩 헤아려 보자.
내용물을 감싼 용기가 있다 → 용기를 담은 단상자가 있다 → 프로모션용으로 두 자루를 묶은 비닐이 있다 → 온라인 주문이라면 에어쿠션을 채운 배송 박스가 있다 → 립스틱은 한 자루인데 포장은 벌써 네 개다.
PPWR은 이 층들을 세개의 이름으로 부른다. 소비자에게 하나의 판매 단위로 건너가는 용기와 단상자는 ‘판매 포장’이다. 이미 판매 단위인 것들을 묶는 비닐은 ‘그룹 포장’이다. 취급과 운송을 돕는 배송 박스와 완충재는 ‘운송 포장’이다.
그 와중에 온라인 주문 배송 박스는 ‘이커머스 포장’이라고 또 따로 부른다. 소비자 눈에 진열되지 않는 층이라고 해서 규제 밖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익숙한 습관 하나를 조심하자. 우리나라 화장품법에서는 내용물에 직접 닿는 용기를 1차 포장, 단상자를 2차 포장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PPWR의 셈법은 다르다. △ 단상자는 용기와 함께 판매 포장 한 묶음이고 △ 그룹 포장 자리는 단상자가 아니라 묶음 비닐이 차지한다. 우리 식으로 ‘2차 포장’을 그대로 그룹 포장으로 옮겨 적으면 분류가 꼬이고, 분류가 꼬이면 뒤따르는 의무 판단도 꼬인다.
범위는 겉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펌프·스포이드·캡·입구를 막은 씰·병에 붙은 라벨은 포장의 구성요소로 함께 평가받는다. 규정의 예시 목록(부속서 I)은 뚜껑에 일체로 달린 마스카라 브러시까지 포장이라고 못 박는다.
이렇게까지 따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앞으로 다룰 재활용성 등급 같은 요건이 재질과 구성요소 단위까지 내려가 평가하기 때문이다. 라벨과 접착제 하나가 포장 전체의 등급을 바꿀 수도 있다.
PPWR이 규정하는 셈법은 어떻게 다른가
판정이 헷갈리는 사례 둘만 보자.
하나, 낱개로도 파는 본품 세 개를 담은 명절 세트박스. 이미 판매 단위인 제품들을 묶었고 벗겨 내도 제품에 영향이 없으니 그룹 포장에 가깝다.
이런 그룹·운송·이커머스 포장을 채우는 사업자에게는 빈 공간을 최대 50%로 묶는 조항이 기다린다. 적용 시점은 2030년 1월 1일과 산정 방법을 정할 시행법령 발효 후 3년 중 더 늦은 날이다. 그리고 배송 박스의 남는 자리를 에어쿠션으로 채워도 규정은 그 자리를 그대로 빈 공간으로 센다. 답은 채우기가 아니라 상자 크기다.
둘, 리필 파우치. 파우치에 담아 파는 리필용 제품은 PPWR이 말하는 ‘리필’이 아니다. 규정의 리필은 소비자가 자기 용기를 가져와 매장 리필 스테이션에서 내용물을 채워 가는 방식을 가리키는 별도 개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익숙한 리필 파우치는 그 자체가 새로운 판매 포장이고 재활용성과 표시 요건도 그대로 받는다. 리필과 재사용의 자리는 뒤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자.
실무에서는 이렇게 따로 셀 수 있는 포장 하나하나를 ‘포장 단위’로 부르고 목록으로 관리한다. 문서 의무가 제품이 아니라 포장에 따라붙기 때문이다.
같은 용기를 쓰는 제품이 열 개라면 서류를 한 벌로 묶을 여지가 생긴다. 다만 재질과 마개만이 아니라 라벨·잉크·접착제까지 같아야 같은 사양이다. 하나라도 다르면 줄은 다시 갈라지고 거꾸로 제품이 하나라도 포장 단위가 넷이면 챙길 줄은 네 줄이다.
이 정의와 분류는 지난 3월 집행위 가이던스와 8월에 개정한 공식 문답집을 통해 세부 사례로 계속 구체화하고 있다. 개정 문답집은 8월 12일 이전에 생산한 포장 재고를 규정 적용만을 이유로 폐기하거나 다시 표시할 필요는 없다는 점도 정리했다. 헷갈리는 품목일수록 최신 문서를 확인할 이유다.
지금 ‘하나만 한다면’ 이것이다. 대표 제품 하나를 골라 오늘의 립스틱처럼 해부하고 나온 포장 단위마다 판매·그룹·운송을 표시한 목록 한 장을 만들어 보자. 포장 사양서나 BOM을 옆에 두고 세면 빠뜨리는 줄이 줄어든다. 이 한 장이 앞으로 만들 모든 서류의 뼈대가 된다.
다음 회에는 그 목록의 줄마다 이름을 적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이 포장의 책임자는 누구인가—용기를 사서 내용물을 채운 브랜드사인가, 용기를 만든 회사인가.
<정연광· 코스무어(COSMURE) 대표 컨설턴트· expert@mocra.co.kr · www.cosmure.com >
































